오랫 만에 멀리 떨어져 있던 지인들을 만났습니다. 만나보니, 그 동안 변한 모습, 그 동안 보지 못했던 모습들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환갑이 넘으신 어머니가 사십이 다 된 아들이 머리를 단정하게 깍지 않는다고 푸념을 하셨습니다. ‘머리를 짧고 단정하게, 깔끔하게 깍으면 참 좋은 인물인데, 왜 머리를 깍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속상해했습니다. 자기 일에 바빠, 머리 깍을 시간조차 없어 보이는데도, 어머니는, 말을 듣지 않는 아들이 야속하기만 한가봅니다. 그때, 다른 한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나이 삼십 대 후반에는 엄마 말씀 들었어? 나는 그 나이 때, 엄마 말씀 안들었는데… 결혼하지 말라는 사람 만나 결혼했지, 뭐 부모 말 들은 게 있나? 애들이 내 말 들을 거라는 착각하지 말고, 속 편하게 살아!’ 제 아들이,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하는듯 합니다^^; 시험을 보면, 항상 한 두개씩 틀려서 옵니다. 왜 틀렸냐고 물어보면, 다 아는데, 깜빡해서 틀렸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누군가 어릴 때 부모님께 했던 이야기랑 똑 같습니다. 그래서, 할 말이 없습니다.
사람은 연령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어른의 생각으로 아이들을 다그치려하니 문제가 많이 발생합니다. 더 이상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나이 때 어땠을까?’ 생각하니까, 조금은 아이들의 생각이 이해가 됩니다. 학교 같다 오면 숙제를 먼저 하고, 조금 놀다가도 책을 읽고 공부하면 좋겠는데, 숙제만 겨우 끝내놓고는 게임만 합니다. 속이 상하는데,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어땠나?’ 생각해보니,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찾으러 올 때까지 나가 놀던 기억이 납니다.
신앙 생활 하는 동안, 성도들을 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성숙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잔소리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렇게 믿어야지, 저렇게 믿어야지’ 내 수준만 생각해서 말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싸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들어보면 ‘다 맞는 이야기’이지만, 서로 다른 수준의 차이 때문에 ‘저만 잘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눈 높이를 맞추어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수준”이 아닌, “다른 사람의 수준”으로 낮아져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났습니다; 팔순이 넘으신 우리 어머니는, 오십이 다 된 저의 형님 목사님이 머리를 깍지 않는다고 요즘도 푸념하십니다. 시간이 지나도 세월의 차이는 줄어들지 않을 것입니다.
박현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