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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 행하신 이를 앙망하십시오!
(이사야 22장 1 – 14절)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히 (9:27).
이는 곧 모든 사람들이 육체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다윗은 죽을 날이 임박하자,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솽상 2:2).
지난 주에도 우리는 장례를 치뤘고, 이처럼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무한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음을 피해보려고 하거나, 최대한으로
늦춰보려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진시황’은 ‘늙지 않고, 죽지 않는 것’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인물로 유명합니다.
진시황은 그의 아버지가 왕에 즉위한지 3년 만에 죽자, 13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죽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고, 47세부터는 신하들을 시켜, ‘불로장생의 약’을 찾아오도록 명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로장생의 약을 찾을 수 없었던 신하들이 모두 도망해 버렸고, “서복”이라는 자가 ‘불로초’를 찾아오겠다며, 수 많은 보물과 사람들을 진시황에게 받아, 배를 타고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진시황은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불로초를 찾기 시작한 지 3년 만인, 50세에 결국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시황의 사인은 ‘수은 중독’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진시황은 오래 살기 위해서 한약을 많이 복용했는데, 그가 복용했던 한약에 수은 함량이 많았던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결국, 죽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오히려 그를 단명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죽지 않으려는 노력, 오래 살고자 하는 노력은, 사실 진시황 만의 것이 아닙니다.
현대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아프지 않고, 더 오래 살려는 노력을 합니다.
건강에 좋다고 하는 음식은, 가격에 상관없이 잘 팔리고/ 생명의 연장을 위해 사람들이 섭취하는 약의 종류와 그 양은 어마어마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할 수 있는대로 죽음을 피하려 하거나, 최대한으로 늦춰보고자 노력합니다.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두번째 반응은, 삶을 마음껏 즐기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아무런 계획 없이 노는 것 좋아하는 후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젠가 그 후배에게, 한번 뿐인 인생, 그렇게 살다가 후회하게 되면 어떡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후배가 저에게 “형님! 한번 뿐인 인생인데, 마음껏 놀아야죠!” 하는 것입니다.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여러분 YOLO족 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YOLO는 You Only Live Once의 준말로, 인생은 단 한번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 후배가 했던 말 그대로, 단 한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고, 사고 싶은 것 마음껏 사면서,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YOLO족 입니다.
요즘은 또 “카푸어” 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동차를 뜻하는 Car와 가난을 뜻하는 Poor가 합쳐진 말로서, 자신의 소득에 맞지 않을 정도의 비싼 차를 소유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집은 없어도, 자동차는 아주 비싼 것을 타고 다니고/ 잘 먹지 못해도, 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에 만족합니다.
이 또한 한번 뿐인 인생을 즐기려는 YOLO의 한 종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품 옷이나 가방 등을 사는데 올인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유명한 세프가 만들었다는, 상상을 초월한 가격의 음식 맛 보는 것을 무리해서라도 즐기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한번 뿐인 인생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철학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저 감동적인 문구일 뿐, 현실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일반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어떤 사람은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을 다이어트 생각 없이 마음껏 먹겠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하고 싶었던 곳에서, 경치를 바라보며 죽겠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몸을 함부로 굴리겠다’고 답했습니다.
‘직장 상사를 때려주겠다’고 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덕성 때문에 당연히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온 것들을 해보고 싶다’고 답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 그루의 사과 나무를 심는다’든지, ‘지난 날의 과오를 회개한다’는 그런 의미있는 대답은 사실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여러분의 반응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환상의 골짜기”란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으로, 그래서 오늘 본문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배경은, 열왕기하 18장에서 부터 20장에 기록된 히스기야 왕때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유다의 히스기야왕 4년,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호세아왕 7년에,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가 앗수르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그리고는 3년 뒤인 히스기야 왕6년, 그리고 호세아 왕9년에,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또 8년이 지난, 히스기야 왕14년에,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게 됩니다.
앗수르는 그야말로 초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이 유다를 침공해오자, 열왕기하 18장에 보시면,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15,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 왕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유다를 괴롭게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고대 문헌에 의하면, 앗수르가 유다의 성 46개를 정복하고, 유대인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공격에 맞써서, 예루살렘 성벽을 점검하고 방비합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시면, “너희가 다윗 성의 무너진 곳이 많은 것도 보며” 이렇게 말씀하시고, 10절에는 “또 예루살렘의 가옥을 계수하며, 그 가옥을 헐어 성벽을 견고하게도 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성벽에 무너진 곳이 있었는데, 이 성벽을 수리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들을 얻기 위해서, 사람이 살지 않는 예루살렘 가옥을 부수었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아마도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가옥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히스기야 왕은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장했습니다.
9절 하반절에 보시면, “너희가 아랫못의 물도 모으며” 이렇게 말씀하셨고, 11절에는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마도, 앗수르의 포위가 오래 지속될 것을 대비하여, 백성들이 사용할 물을 저장해둔 것으로 보여집니다.
히스기야는 이렇게 죽음을 피하기 위해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유다의 백성들은 그 삶을 포기했습니다.
13절에 보시면,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하고, 예루살렘을 에워싸자, 어차피 죽을 것이기에, 오늘 먹고 마시며 즐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22:11).
히스기야를 비롯한 유다의 사람들은, 그들이 환난을 당하는 것이 앗수르가 유다를 침공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죽음의 위기 앞에 놓이게 된 것은, 앗수르 때문이요, 자신들은 앗수르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전쟁에 사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맞서 성벽을 수리하고 저수지를 만든 것이요/ 백성들은 앗수르라는 세력에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 삶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본문 2절에서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
곧, 앗수르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 유다가 죽음에 직면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께서 이를 행하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이스라엘을 자녀 삼으셨으며, 이스라엘과 관계하기를 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스라엘은 여러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본문 1절에 예루살렘을 “환상의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예루살렘을 “환상의 골짜기”라고 부른 것은, 그곳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아야 하는 곳이, 우상에게, 특별히 몰렉에게 아이들을 불태워 바치는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자녀들을 불태웠습니다.
그래서 “환상의 골짜기”라는 별명은, 사실 더 이상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을 보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비웃는 목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1절을 계속 보시면,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시에 이방 민족들은, 우상에게 제사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 위에서 재물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지붕에 올라감은 어찌함인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환상을 구해야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히려 우상에게 제사함이 어찌된 것이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벌하실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벌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하나님의 분노”였습니다 (사 10:5).
이스라엘은 앗수르 때문에 죽음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죽음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옥을 부수어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하거나,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여 앗수르에 대항할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고,”/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할 것이 아니라, “이 일을 경영하신 하나님을 공경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모두 죽음의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이는 다만 육체적인 죽음 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가져온 영적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으며/ 영원한 단절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영원한 죽음의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 두시고는, 동산에 있는 각종 열매 맺는 나무의 실과를 마음껏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 만은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존재임을 인식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과 같아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존재가 아닌, 스스로가 자기 인생의 하나님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사람은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며,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이기를 원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죽음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은, 질병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날고기를 그냥 먹고, 손을 잘 씻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좋지 않은 음식을 너무 많이 먹기 때문도 아니며, 그에 비해서 운동을 잘 안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이는 총기를 강하게 규제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며, 이는 전쟁 때문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죽음의 문제에 직면해 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성벽을 보수하고, 저수지를 만드는 등, 생명의 연장을 위해 수고할 것이 아니며/ 어차피 죽을 한번 뿐인 인생, 마음껏 즐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 일 행하신 이를 앙망하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사,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하셨으며/ 삼일 만에 부활하사,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이 믿음을 우리의 의로 여겨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계획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사,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은혜 앞에, 그저 엎드릴 뿐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께 우리의 삶을 온전히 내어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모든 것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우리 안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사시도록, 끊임없이 우리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금식을 하는 등, 우리의 몸을 힘들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의 수요일에 이마에 재로 십자가를 그리며 사순절을 시작하여/ 사순절 동안 금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주간 특별 새벽 예배를 드리고/ 성금요예배를 드리며/ 부활주일 새벽에 하얀 옷을 입고 모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외식하는 신앙생활에 반대하며 종교개혁을 일으켰는데/ 오히려 현대의 교회들이 더욱 더 형식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께, 삶을 드려 순종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길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내 안에 그리스도 만이 사시도록 힘쓰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잠잠히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길입니다.
우리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 닮기를 소망하고,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심 같이, 은혜 베풀며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죽음의 문제의 유일한 해결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이 모든 일을 행하신 이를 앙망하고, 이 모든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여, 온 삶을 내어 드리는 하이랜드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